도쿠가와 아키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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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1853년 미토 번의 에도 별저에서 태어난 일본의 무사, 다이묘, 정치가이다. 그는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이자, 1866년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받았다.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일본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하여 유럽 각국을 순방하며 외교 활동을 펼쳤다. 메이지 유신 이후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가 되었으며,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군 복무를 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다양한 취미 활동을 즐겼으며, 191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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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아키타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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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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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도쿠가와 아키타케 |
본명 | 마쓰다이라 요하치마로, 아키노리, 아키타케, 도쿠가와 아키타케 |
자(字) | 자메이 (子明) |
시호 | 세쓰코우 (節公) |
출생 | 1853년 10월 26일 |
출생지 | 에도 |
사망 | 1910년 7월 3일 |
사망지 | 도쿄 |
묘소 | 즈이류잔・도쿄도도시마구의 소메이 묘원 |
국적 | 일본 |
관직 | |
관위 | 종5위 하・시종 겸 민부대보 종4위 하・좌근위권소장 종3위 종1위 훈1등 |
주군 | 도쿠가와 요시아쓰 → 도쿠가와 요시노부 → 메이지 천황 |
번 | 히타치국미토 번 번주 → 미토 번지사 |
가문 | |
씨족 | 도쿠가와 씨 (미토 가문 → 시미즈 가문 → 미토 가문) |
아버지 | 도쿠가와 나리아키 |
어머니 | 마데노코지 무쓰코 |
형제자매 | 요시아쓰 지로마로 사부로마로 시로마로 이케다 요시토쿠 로쿠로마로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나오요시 이케다 시게마사 마쓰다이라 다케사토 기쓰레가와 쓰나요시 여이마로 여삼마로 마쓰다이라 아키노리 여오마로 마쓰다이라 다다카즈 쓰치야 아키나오 아키타케 마쓰다이라 요시토시 스무마로 스물한마로 마쓰다이라 요리유키 |
배우자 | 나카노인 미치토미의 딸・모리코 첩: 사이토 간쿄의 딸・야에 |
자녀 | 다케사다 아키코 (마쓰다이라 요리히사 실) 마사코 (모리 모토오 실) 나오코 (마쓰다이라 나리카게 실) 아쓰코 (교고쿠 다카노부 실) |
양자 | 아쓰요시 |
정치 경력 | |
정치 체제 | 에도 막부 (메이지 정부) |
임기 시작 | 1868년 |
임기 종료 | 1871년 |
이전 | 도쿠가와 요시아쓰 |
이후 | 폐번치현 |
기타 정보 | |
참고 자료 | https://www.ndl.go.jp/portrait/datas/146/%7C도쿠가와 아키타케%7C근대 일본인의 초상 도쿠가와 아키타케 유럽에서 인기를 얻은 미소년・도쿠가와 아키타케──「프린스 아키타케」라고 불렀던 막부의 사정과 사쓰마 번과의 공방 |
2. 생애
1869년 유럽에서 귀국한 뒤 미토 도쿠가와 가문을 정식으로 상속하여 번주에 취임했다. 신정부에 따라 오우・하코다테 전쟁에 참가했다.[5] 같은 해 판적봉환에 의해 미토 번 지사가 되었으며(민부대신은 사임), 홋카이도의 토지 할당을 출원하여 8월 17일에 홋카이도 테시오국 중 토마마에군, 테시오군, 가미카와군, 나카가와군과 기타미국 중 리시리군의 총 5개 군의 지배를 명받았다.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에 의해 번 지사를 면직당하고[5], 도쿄부무코지마의 코우메 저택(구 미토 번 하야시키)에서 생활했다.
1875년, 육군 소위에 임관하여 초기의 육군 도야마 학교에서 교관으로서 학생대에 군사 교양을 가르쳤다. 같은 해 나카인 통부의 딸 모리코(에이히메)와 결혼했다.
1876년 필라델피아 만국 박람회 담당자가 되어 미국을 방문했다.[4][5] 그 후, 형제인 쓰치야 스케나오, 마쓰다이라 요시노리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다시 유학했다.[5] 1880년 여름방학까지 유학처인 에콜 몽주를 퇴학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벨기에를 여행한 후, 런던에 반년 동안 체류하고, 이듬해 1881년 6월에 귀국했다.[4][5]
1883년 1월에 장녀 쇼코가 태어났으나, 이듬해 2월 산후 회복이 좋지 않아 아내 모리코가 사망했다. 5월에 은퇴를 신청하고 조카 아쓰타카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이듬해에는 생모 아키바를 데리고 도테이 저택(지바현 마쓰도시)으로 이사했다. 1892년, 차남 다케사다가 자작에 서임되어 마쓰도 도쿠가와 가문을 창설했다.
은퇴 후 자전거 타기, 사냥, 사진, 원예 등 다채로운 취미를 즐겼다. 특히 사진 촬영에 열심이어서 스스로 현상도 했으며, 현재도 많은 사진이 남아 있다. 또한 조원에도 주력하여, 현재는 지바 대학 원예학부 부지에 해당하는 구획에 서양식 정원을 짓고 식물을 재배했다. 그 정원은 요사노 아키코가 와카에 읊은 "마쓰도의 언덕"이다.[10]
1898년 아쓰타카가 44세로 사망하자, 구니유키가 11세로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가 되어, 아키타케가 후견인이 되었다.
1910년 7월 3일, 고바이 저택에서 향년 58세로 사망했다.[5]
2. 1. 초기 생애 (1853년 ~ 1866년)
가에이 6년(1853년), 에도 고마고메의 미토 번 나카야시키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요하치마로'''였다. 같은 해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을 방문했다.[5] 그는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18번째 아들이었다. 생후 반년 만에 미토에서 양육되었지만, 막말의 동란으로 분큐 3년(1863년) 6월에는 다시 에도로 들어갔다. 같은 해 11월, 교토에서 병사한 동모형(同母兄) 마쓰다이라 아키노리의 '간호'를 명목으로 상경하게 되어, 겐지 원년(1864년) 1월에 상경했다. 5월에 아키노리의 상을 발한 후, 후임으로 어소(御所) 수호에 임명되었다.[5]같은 해 7월, '금문의 변' 때는 조어전(常御殿) 동쪽 층 근처를 경비했다.[5] 교토 경비의 공로로, 11월 19일 종5위하·시종, 이어서 같은 달 28일 민부대보에 서임되었다.[5]
당초에는 조자정(長者町)의 번저(藩邸)에 체재했지만, '금문의 변' 후에는 도다이니 조라쿠지, 혼코쿠지에 체재했다(이로 인해 체경(滞京) 중의 미토번사는 '혼코쿠지 세력'이라고 칭해졌다). 체경 중의 사막(佐幕) 활동은 매우 바빠, '금문의 변'이나 텐구당의 난에 즈음하여서는 일군의 장(将)으로서 출진하는 등, 어린 나이에도 막말의 동란에 참여하고 있다.
1866년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사망하자 에도로 소환되었고, 이름은 마쓰다이라 아키노리(松平 昭徳)에서 도쿠가와 아키타케로 변경되었다.
2. 2.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 상속 (1866년)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사망으로, 그의 인호인 "쇼토쿠인"과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휘를 '''아키타케'''로 고쳤다. 1866년 11월, 그 전까지 20년간 당주가 없었던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받아 재흥시켰다.[4][5] 종4위하·사콘노에곤쇼쇼[5] 동시에 파리 만국 박람회에 쇼군 요시노부의 명대(대리인)로 유럽 파견을 명받았다.[4]아키타케가 선택된 이유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황태자(프티 프린스)가 10세로, 나이가 비슷한 쪽이 친근감을 가질 수 있다는 점, 박람회 후 유럽 각국을 방문하여 견문을 넓히고, 파리에서 3년에서 5년 유학하며 근대 지식을 배우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파견안에 대해 혼코쿠지 세력의 미토 번사들은 맹렬히 반대했고, 형인 돗토리 번주 이케다 요시노리, 오카야마 번주 이케다 시게마사 등도 반대했다. 이 때문에 아키타케의 신분을 미토 번에서 분리하기 위해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을 상속하게 했고, 또한 함께 내정되어 있던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와의 양자 결연도 이때 해소되었다.
2. 3. 파리 만국 박람회 참가와 유럽 방문 (1867년 ~ 1868년)
1866년 말, 14세의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프랑스 특명 전권 대사로 임명되어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일본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했다. 당시 일본은 박람회에 전시관을 운영했다.[1]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866년 도쿠가와 아키타케의 회계 및 비서로 임명되어 파리 대표단에 합류했으며, 임무 수행 중 간결한 일기를 기록했다.[2] 대표단은 1867년 1월 11일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두 달 후에 파리에 도착했다.[3][4] 박람회는 유럽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많은 방문객들이 처음으로 일본 예술과 기술을 접할 수 있게 했다.[5]나폴레옹 3세와의 면담은 성공적이었으며, 박람회가 끝난 후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영국 등 여러 유럽 국가를 여행하면서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영국 여왕 빅토리아를 만났다.[6][7]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와 함께 그는 전통적인 일본식 전투 상의를 입은 병사들을 사열했으며, 이 장면은 사진으로 촬영되었다.[8]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했다.[9] 보신 전쟁의 시작 소식을 듣고 일본으로의 긴급 귀국을 계획했지만,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에 머물러야 했으며, 1868년 8월에야 새로운 메이지 정부로부터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노르망디, 루아르 강 유역, 낭트를 방문하며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했고, 파리로 돌아와서는 메이지 정부로부터 이복 형제 도쿠가와 요시아쓰의 사망 소식을 듣고, 미토번의 안정을 위해 ''다이묘''의 직위를 이어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1868년 12월 마르세유를 출발했다.
1867년 2월(게이오 3년 1월), 아키타케는 2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약 50일간의 항해 끝에 프랑스에 도착했다.[10] 사절단의 책임자는 향산 이치리였고, 수행원으로는 아키타케의 시동 기쿠치 헤이하치로 등 미토 번사 6명이 포함되었다.[11]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에서 도항 경험이 있는 다나베 타이치, 스기우라 조를 비롯하여 호시나 슌타로, 구리모토 콘이 있었다. 회계 담당으로 시부사와 에이이치, 수행 의사로 다카마쓰 료운, 통역으로 야마우치 테이운, 번역자로 미쓰쿠리 린쇼가 동행했다. 아이즈번의 에비나 키쇼, 요코야마 쓰네모리와 하리마야마사키번의 기무라 소조, 가라쓰번에서 온 유학생도 함께했다. 사가번의 사노 쓰네타미, 프랑스 영사 레옹 뒤리,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일본 민간인 유일의 출품자가 된 상인 시미즈 우조로 일행과 영국 공사관 통역 알렉산더 폰 지볼트도 영국 귀성을 위해 동행했다.
프랑스 증기선 알페 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홍콩, 프랑스령 사이공, 싱가포르, 실론 등을 경유하여 수에즈를 거쳐 프랑스에 도착했다.
도착 후 아키타케는 나폴레옹 3세를 알현하고 파리 만국 박람회를 방문했다. 박람회 종료 후에는 막부 대표로서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각국을 방문했다.[10]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영국 여왕 빅토리아를 알현했다. 이후에는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보냈다.[10]
1868년(게이오 4년) 1월, 외국봉행 가와카쓰 히로미치의 연락을 통해 형인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행한 것을 알고 사절단의 입장은 미묘해졌다. 3월, 도바-후시미 전투 소식이 프랑스 신문에 게재되자 수행하던 구리모토 등은 귀국하고, 아키타케를 비롯한 7명은 잔류했다. 신정부로부터 귀국 요청이 왔지만, 4월에는 요시노부로부터 학문을 계속하라는 편지가 왔다. 그러나 일행은 체류비와 귀국 비용을 걱정했고, 먼저 귀국한 구리모토 등으로부터 송금이 없는 것에 분개했다. 구리모토 등이 일본 요코하마에 귀국했을 때는 이미 에도의 거리는 신정부에 넘어갔고, 1868년 7월 4일(5월 15일) 쇼기대의 전투(우에노 전쟁)가 한창이었다.
1868년 7월 4일(5월 15일) 프랑스에 신정부로부터의 귀국 명령서가 도착하여 일행은 귀국하게 되었다. 프랑스 관계자 중에는 유학을 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키타케 등은 신정부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 도쿠가와가의 인상을 나쁘게 할 것이라는 우려와 체류 비용 등에 곤란을 겪게 될 것을 우려하여 귀국을 결정했다. 체류 마지막 추억으로 10일 동안 노르망디의 캉과 셰르부르를 돌아 루아르 강 하구의 낭트까지 여행했다. 파리에 돌아오자 맏형인 미토 번주 게이토쿠가 사망했다는 편지가 도착하여, 미토 번의 정세 안정을 위해 차기 번주로 지명되었다. 미토 번에서는 이사카 센타로, 핫토리 준지로가 파견되어 도항했다.
유학 중 일기에서 1868년 8월 3일 "아침 8시, 코코아를 喫んだ|마셨다프랑스어 후, 해군조선소를 방문한다"라는 기록은 일본인이 처음으로 코코아를 마신 가장 오래된 사료 기록이다.[12][13]
1868년 10월 18일(9월 4일)에 영국 배 펠루즈 호로 마르세유를 출발, 1868년 12월 6일(11월 3일)에 가나가와에 귀착했다. 상하이에서 무기 조달을 위해 와 있던 아이즈 번사와 무기 상인 스넬에게 면회를 신청받아 하코다테고료카쿠의 구 막부군에 기두(旗頭)로 참가해 달라는 청원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미토 번에서는 번사의 분열을 억제하지 못하고 홍도관 전쟁이 발발했다. 귀국 도중 가고시마 연안을 통과했을 때, "쓸모없는 사쓰마의 연안을 통과"라고 일기에 기재하여, 사쓰마에 대한 강한 원한을 엿볼 수 있다.
2. 4. 귀국과 미토 번주 취임 (1868년 ~ 1871년)
1869년 유럽에서 귀국한 뒤 미토 도쿠가와 가문을 정식으로 상속하여 번주에 취임한다. 신정부에 따라 오우 ・ 하코다테 전쟁에 참가했다[5]. 같은 해 판적봉환에 의해 미토 번 지사가 되었다(민부대신은 사임). 홋카이도의 토지 할당을 출원하여 8월 17일에 홋카이도 테시오국 중 토마마에군, 테시오군, 가미카와군, 나카가와군과 기타미국 중 리시리군의 총 5개 군의 지배를 명받았다.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에 의해 번 지사를 면직당하고[5], 도쿄부무코지마의 코우메 저택(구 미토 번 하야시키)에서 생활한다.2. 5. 메이지 시대의 활동 (1871년 ~ 1910년)
1869년,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도쿠가와 요시아쓰의 뒤를 이어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11대 당주가 되었다.[3] 그러나 같은 해 ''다이묘'' 칭호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미토 번 지사로 활동했다. 1869년 8월 17일, 번의 전직 사무라이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홋카이도 토지 개발을 요청, 토마마에 군, 테시오 군, 가미카와 군, 나카가와 군 (테시오노쿠니)과 리시리 군 (키타미노쿠니)의 토지를 받았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인해 정부 명령에 따라 미토를 떠나 도쿄 무코지마에 있는 미토 가문의 옛 ''시모야시키'' 별저에서 거주했다.1875년,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임명되어 육군 도야마 학교 초창기 교관으로 복무했다. 같은 해 나카노인 에이코와 결혼했다. 1876년, 1876년 세계 박람회 일본 전시 담당 특사로 미국에 파견되었다.[3] 이후 동생 츠치야 시게나오, 이복 형제 마츠다이라 노부노리와 함께 학업을 위해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3] 프랑스 제2제국이 프랑스 제3공화국으로 바뀐 8년 동안 프랑스에 머물렀다. 1881년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업을 마친 후,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아들인 조카 도쿠가와 아츠요시와 함께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벨기에를 여행했다.
1883년 아내 에이코가 딸을 낳은 직후 사망하자,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은퇴했다. 1884년 씨족의 지바현 마쓰도에 있는 도조테이 별장으로 이주했다. 후계자가 없어 도쿠가와 아쓰요시를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후계자로 입양했으나, 아쓰요시는 1898년 44세로 사망했다. 아쓰요시의 아들 도쿠가와 구니유키는 당시 11세였으며, 아키타케의 지도하에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13대 당주가 되었다.
1888년 아키타케는 측실에게서 아들 도쿠가와 다케사다를 얻었다. 1892년 다케사다는 화족 제도를 통해 자작(shishaku)이 되었고, 별도의 마츠도 도쿠가와 가문을 창설했다.
1903년,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욱일장 2등을 수여받았다. 1910년 코우메테이 저택에서 사망했다.
2. 6. 사망 (1910년)
1883년, 아내 에이코가 딸을 출산한 직후 사망했다.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은퇴하여 1884년, 지바현 마츠도에 있는 도조테이 별장으로 이주했다. 후계자가 없던 그는 도쿠가와 아쓰요시를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후계자로 입양했다. 아쓰요시는 1898년 4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쓰요시의 아들 도쿠가와 구니유키는 당시 11세였으며, 아키타케의 지도하에 미토 도쿠가와 가문의 13대 당주가 되었다.1903년,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욱일장 2등을 수여받았다. 그는 1910년 고우메테이 저택에서 사망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도쿠가와 나리아키 | |
어머니 | 마데노코지 도시코 | 만리코지 무츠코라고도 한다. |
부인 | 에이코 | 나카노인 미치토미의 딸, 모리코라고도 한다. |
측실 | 오야에노카타 | 사이토 츠라유키의 딸인 사이토 야에라고도 한다. |
장녀 | 마쓰다이라 아키코 | 마쓰다이라 요리나가와 결혼 (에이코 소생), 마쓰다이라 요리히사의 부인. |
차녀 | 모리 마사코 | 모리 모토후지와 결혼 (오야에 소생), 모리 모토오의 부인. |
장남 | 도쿠가와 타케마로 | 태내에서 사망 (오야에 소생) |
차남 | 도쿠가와 타케사다 | (1888–1957) (오야에 소생) |
삼녀 | 마쓰다이라 나오코 | 마쓰다이라 나리미쓰와 결혼 (오야에 소생) |
사녀 | 교고쿠 아츠코 | 교고쿠 타카오사와 결혼 (오야에 소생) |
삼남 | 도쿠가와 타케오마로 | 태내에서 사망 (오야에 소생) |
양자 | 도쿠가와 아츠히로 | (1855년 - 1898년) - 맏형 게이토쿠의 장남 |
4. 평가 및 유산
도쿠가와 아키타케는 자전거 타기, 사냥, 사진, 원예 등 다채로운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은퇴 후에는 시즈오카를 자주 방문하여 요시키와 함께 사진 촬영이나 사냥을 즐기는 등 교류를 깊게 하였다.[10] 사진 촬영에 매우 열심이어서 스스로 현상도 하였으며, 현재도 많은 사진이 남아 있다.[10]
또한 조경에도 힘을 쏟아, 현재 지바 대학 원예학부 부지에 해당하는 구획에 서양식 정원을 짓고 식물을 재배했다.[10] 그 정원은 요사노 아키코가 와카(和歌)에서 "마쓰도의 언덕"이라고 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10]
5. 연표
연도 | 사건 |
---|---|
가에이 6년(1853년) | 탄생 |
분큐 3년(1863년) | 상경하여 사쿠보 활동에 종사. 종5위하·시종·민부대신에 임관. |
겐지 원년(1864년) | 덴구당 토벌에 출진. |
게이오 2년(1866년) | 쇼부로 개명. 시미즈 도쿠가와가를 상속. 종4위하·좌근위권소장. 파리 만국 박람회에 참가. 이후 유럽 각국을 역방하는 등 프랑스에서 유학. |
메이지 2년(1869년) | 프랑스에서 귀국, 미토 번주에 취임 (미토 도쿠가와가를 상속). 판적 봉환에 의해 미토 번 지사. |
메이지 3년(1870년) | 영세록 (3500석). 홋카이도 개척을 순견. |
메이지 4년(1871년) | 폐번치현. 도쿄로 이주. |
메이지 7년(1874년) | 육군 소위 임관. |
메이지 8년(1875년) | 육군 도야마 학교 교관 (학생대 부). |
메이지 9년(1876년) | 미국 만국 박람회 어용계로 미국에 파견. 육군 소위 면관. 프랑스에서 유학. |
메이지 14년(1881년) | 귀국. 종3위, 자향간지후. |
메이지 15년(1882년) | 오노 목장[11] 부흥. 코우메 저택 행차. |
메이지 16년(1883년) | 미토 도쿠가와가 가독을 조카 아쓰요시에게 양도하고 은거. |
메이지 17년(1884년) | 토테이 저택에 거주. |
메이지 25년(1892년) | 친자 다케사다, 자작 수작 (마츠도 도쿠가와가의 창설). |
메이지 30년(1897년) | 종2위에 서위. |
메이지 31년(1898년) | 미토 도쿠가와가 가독을 이은 아쓰요시의 유아 구니유키를 후견. |
메이지 35년(1902년) | 정2위에 서위. |
메이지 36년(1903년) | 훈2등 서보장을 받음. |
메이지 43년(1910년) | 사망. 종1위, 훈1등 서보장을 받음. 묘소는 이바라키현히타치오타시의 즈이류산. |
참조
[1]
문서
Tokugawa Akitake artifacts at his villa in Matsudo, Chi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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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ire for the 1867 World 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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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National Diet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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徳川昭武|近代日本人の肖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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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立国会図書館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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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obank
徳川昭武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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徳川昭武の初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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欧州で人気を博した美少年・徳川昭武──「プリンス昭武」と呼ばせた幕府の事情と薩摩藩との攻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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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刊サイゾー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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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戸藩に関する史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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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チョコレート事始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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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チョコレート・ココア協会
2018-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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庭園の記憶―与謝野晶子の「松戸の丘」と園芸学校の絵画―千葉大学園芸学部創立100周年記念特別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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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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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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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能林業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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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5842号
190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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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官報 第1952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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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村橋之助襲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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青天を衝け:大河ドラマ新キャスト発表 磯村勇斗が第14代将軍・徳川家茂 深川麻衣が和宮 西郷隆盛役は博多華丸
https://mantan-web.j[...]
2021-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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